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동로 사건 (문단 편집) === 장쉐량의 의도는? === 한편 당시 만주에서는 소련과 공동 관리하는 중동로만 있던 게 아니었다. 당장 일본이 주장하던 길회철도 문제를 비롯해서 오히려 일본의 철도부설권 문제가 쟁점이었고 요령국민회교협회 등이 일화배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장쉐량이 일본에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으면서 소련에는 강경한 대처를 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장쉐량이 철로를 회수한 이유로는 여러 요인이 지적되고 있다. 우선 장쉐량을 피동적으로 보는 시각으로는 중동로를 무리하게 회수한 배경에는 장제스가 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장쉐량이나 봉천군벌은 소극적인데 장제스가 강경책을 주도하여 어린 장쉐량을 조종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장제스가 장쉐량을 부추긴 이유는, 소련과 장쉐량이 싸워서 장쉐량의 세력이 약화되길 바랬다는 음모론적인 시각과 만주에서 소련의 적화 음모를 제거하기 위함이었다는 반공적인 의도가 대립하고 있다. 그외에는 장제스가 아니라 [[미국]]이 소련을 제거한 후에 만주에 진출하려 했다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시각들은 장쉐량의 주동성을 무시하거나, 언급하더라도 장쉐량의 '애국주의'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러한 장쉐량 피동설, 장제스 주도설은 자세한 정황을 살펴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장쉐량의 능동적인 태도를 중심적으로 보는 쪽에서는 이후 내셔널리즘의 고취로 각종 불평등 조약을 철폐하고 부당하게 빼앗긴 이권을 되찾아오자는 움직임이 강했던 당시 중국 상황을 주목한다. 당시 만주에서도 내셔널리즘이 강하였는데 소련이 중동로의 이득을 부당하게 취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자 중국 곳곳에서 반발하는 움직임이 벌어졌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장쉐량은 길회철도 문제 등에서 일본에 지나치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서 '매국노' 소리를 듣는 등 만주 곳곳에서 반장쉐량 세력이 확산되고 있었고 이에 장쉐량은 중동로의 이권을 회수함으로 민족주의 움직임에 화답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려 했던 것이다. 게다가 장쉐량 치하의 만주는 이러한 내셔널리즘 열풍과 더불어 장쭤린-장쉐량 부자가 펑펑 써댄 군비 때문에 경제위기에 처해 있어 몹시 불안정했다. 1925년 11월에 일어난 [[궈쑹링]]의 [[반봉사건]]으로 봉천군벌의 타격은 컸고 무리한 관내 진출로 인하여 재정적 타격이 심화되었다. 거기에 봉천군벌이 남발한 봉표의 가치는 날이 갈수록 폭락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1928년 즈음에 만주의 경제는 붕괴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장쉐량은 이득을 내고 있는 중동로에 침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장쉐량은 중동로 회계과를 요구하고 있었고 소련은 이에 대해 절대 거부를 천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